탄압을 각오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 갔고 신심 생활을 계속해갔고 창서 직후부터 일반 민중을 위하여 한글 교리서를 번역하여 보급했다. 또, 당시 신자들은 박해시대의 교회에서는 순교자들의 기록으로 용기를 길렀다. 「성녀 아가타」,「성녀빅토리아」등 로마시대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으며
1장 금서와 역사
1. 금서로 역사읽기
왜 찬란한 출판문화가 아니고 금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가? 그 이유는 첫째, 역사의 발전과정에 많은 영향을 주고 현재까지도 휼륭한 책으로 일컬어지는 것 가운데 상당수가 그 시대에는 지배권력에 의해 금서처분을 받은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서적에
유입 → 진․한교체기에 유이민의 유입 → 위만의 무리가 들어옴 → B.C. 194년 위만이 준왕을 쫓아내고 집권(위만조선) → 한과 남쪽의 진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리익, 활발한 정복사업 → B.C. 108년 한 무 제의 대규모 무력진압으로 멸망 → 고조선의 고토에 한 4군 설치 → 토착민의
서학의 유입이 초기의 보유론(保維論)적 단계를 지나 반(反)유교적 단계로 이행하면서 정부는 서양문물과 신앙을 사설로 규정하고 엄격히 배척/억압하였으나 서양종교의 침투가 확산되고 서양의 무력압박은 점차 심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조선이 당면하고 있던 안팎의 도전 중에서 이러한 서
서학은 우리나라에 유입된 외래문화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다른 문화 유입의 경우에는 우리 민족이 자주적인 입장에서 수용 또는 배척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 냈던 것과 달리, 서학은 당시 정권 담당자들과 민중들의 거센 반발 속에서 강제적으로 유입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표
수용되었고 이윽고 신앙의 수준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주가사는 천주교 전파의 중요한 수단으로써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가사가 종교적 전파의 수단이 되었을까? 그 이유는 조선 후기의 가사가 사대부에게서만 창작되고 향유되던 종전의 가사와는 달리 일반 민중으로 확대되
2) 천주교와의 만남
이벽은 일찍이 천주교에 심취하여 남몰래 성서를 보던 중 마침내 권철신의 천진암-주어사 강학회의 소식을 듣게 된다. 천진암-주어사 강학회는 한국 천주교 역사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권철신은 1777년 천진암-주어사 강학회를 열고 밤에 눈길을 헤쳐 온 이
Ⅰ. 개요
실학은 조선시대 당시에 유학자들이 이론과 학설만 따지고 백성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하자, 이러한 사회적 모순을 직면하게 되어 그 해결책을 찾고자 일련의 사회개혁을 내놓은 데서 비롯됐다. 실학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사회 개혁 사상으로 실사구시의 학문이다.
생활에 실용적인 학문
정조대에 시행되었던 준론탕평론(의리의 변발을 보다 중요시하지만, 붕당의 타파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긍정하는 견해이다.)은 각기 상이한 특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이 양자는 탕평론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상호 합치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정치를 이끈 통치이론이었
1부1장
1. 상고시대문학
① 현존 최고(最古) 기록 역사서 문헌에 나타난 우리에 관한, 현존하는 최고의 기록은 중국 진나라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이다.
② 제천의식의 가사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개인적 서정보다는 집단적 서사를 노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三國遺事」